Permeating love
사랑은,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 같은 것
이름만으로도 그 무한한 존재감이 돋보이는 여배우가 있다. 내겐 산드라 블록이 그런 존재다. 사실 그녀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들을 그동안 관심있게 지켜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에 출연한 '그래비티'에서의 연기가 맘에 들어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녀의 이름만큼은 정말 수 없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왜 그녀가 그렇게 유명해졌을까'에 대한 의문이 어찌보면 당연히 생길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고,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작품이 바로 '당신이 잠든 사이에'다.
산드라 블록은 이 영화에서 주연인 '루시'역을 맡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없는 그녀의 일과는 무미건조했다. 매일매일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철역에서 티켓을 판매하는 직종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녀는 언제나 유리창 너머에 가로막혀 있었다. 단절되어 있지만 단절되어있지 않은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짝사랑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피터'다. 늘 말끔한 차림의 정장으로 출퇴근하는 그를 보는 것이 어찌보면 그녀의 하루 일과중 유일한 낙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승강장에서 피터는 예기지 않은 사고를 당하고 이를 목격한 루시가 그를 구해 병원으로 데려간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본격적인 재미요소(?)가 등장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피터의 가족들이 하나 둘씩 병원으로 찾아오는데, 그의 옆에 있는 루시를 보고 '저 아가씨가 약혼녀로군'이라고 마음대로 오해해 버린 것이었다. (간호사들의 초스피드한 입소문) 하지만 루시는 평소 자신이 짝사랑 하고 있었던 남자이기 때문에 그 오해가 굳이 싫지 않았을 뿐더러, 오해를 해명할만한 기회오차 마땅히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저냥 지나가기로 한다.
어떤 오해를 받든 어쨌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쳐서 혼수상태에 놓여있으면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 그녀는 몇 번에 걸쳐 피터를 찾아갔고, 또 자신이 실은 약혼녀가 아님을 밝히기 위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피터의 할아버지가 이런 상황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깨트리기 싫다는 이유로 그녀가 진짜 약혼녀가 되어주기를 내심 바란다. 그러나 피터의 동생인 잭(빌 풀만 분)은 그녀가 피터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으며, 약혼녀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이렇게 얽힌 관계에서 루시는 피터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되고, 그의 본 모습이 사실은 자신이 바라는 완벽한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그녀를 스칠 때, 그녀의 곁에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잭의 모습은 루시에게 순수해 보였고, 루시는 점점 잭의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리며 갈등의 골은 깊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피터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는데 루시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가 진짜 약혼녀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도 가족들은 '사고의 충격으로 약혼녀를 기억하지 못하는군'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알콩달콩 예쁜 사랑을 이어나가길 강요(?)한다. 그렇게 피터의 가족들에게 등 떠밀리듯이 두 사람은 결혼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형인 피터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루시의 숨겨진 매력에 빠진 잭은 그 결혼식장에서 루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결혼식장에 실제로 피터와 약혼을 했던 여자가 나타나면서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애매해 지지만 결국엔 잭과 루시의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결말로 이어진다.
'잭'역할로 출연했던 빌 풀만의 지금 모습을 보면 당시의 산드라 블록에 비해 다소 늙은 할아버지의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1953년생이니 벌써 환갑을 지난 나이라서 당연한거긴 한데, 그래도 영화 속에 등장했던 잭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었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모습도 귀여웠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까지의 모든 모습들이 참 훈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랑에 비하면 예전의 사랑은 참으로 순순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요즘에는 흔히 '훈남 훈녀'라느니, '썸남썸녀'라느니 같은 단어들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명확한 단어로 정리해서 쉽게 이야기 하곤 하는데, 사실 감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몇 가지의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순간에 폭풍처럼 몰아쳐서 한 눈에 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스며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랑에 빠져 있는 그런 경우도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스턴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회에서는 간편하고, 어렵지 않고, 뜸들일 필요 없는 감정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서 내심이 불편한 기분이 드는건 사실이다. 시대가 변하니까 그에 맞춰서 개념도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몇 가지 변하면 안되는 가치들이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써, 사람들이 '사랑'을 대할 때는 최소한 너무 가볍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요즘 사람들에게 더 권하고 싶다. '나 너 좋아, 나 너 사랑해, 사귀자, 헤어지자'이런 얘기들이 너무 쉽게 오가는 분위기에 지쳐, 진정한 사랑의 가치가 무엇인지 흐려지는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달굴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스며드는 사랑이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그런 과정을 거치며 생각하는 사랑의 경험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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