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를 맡으면 힘이난다더라"
우리의 삶 속에, 슬로우비디오
차태현의 연기는 왠지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의 질리지 않는 연기가 이번 영화에서도 잘 통한 것 같다. 너무 코믹스럽지는 않게, 그러면서도 진정성을 잃지 않은 듯한 스토리에 차태현이 아주 잘 녹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이런 유쾌한 장르의 스토리를 소화하기에 아주 적합한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캐릭터에는 차태현만한 인물이 없달까?
원래 한국영화를 예고편을 보고 고르는 법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슬로우비디오만큼은 달랐다. 등장인물, 스토리, 주제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놓치면 왠지 아까울 것 같은 아이템들도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예매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응?) 각설하고, 차태현의 연기를 꽤나 오랜만에 본 것 같아서 내심 반갑기도 했다. 아마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영화가 '헬로우 고스트'였던 것 같다. 이제는 설이나 추석 연휴에 쉽게 TV에서 만날 수 있는 영화가 되었는데,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지금은 차태현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영화배우 혹은 연기자로 존재했던 차태현이 있었다면 오늘의 차태현은 예능에서도 끼를 숨기지 않고 즐겁게 방송하는 방송인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이미지를 구축하기까지 1박2일이 정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렇데 하나씩 쌓아올린 인지도가 슬금슬금 제대로 된 빛을 발해야 되는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슬로우비디오는 주연배우 이외에도 주제나 스토리가 생각보다 신선했다. '동체시력'이라는 기존에는 없었던 독특한 소재도 그렇고, 관제센터라는 독특한 공간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리적 위치 또한 좋았다. 종로구라니. 좁지만 길이 예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종로의 곳곳을 CCTV를 통해 혹은 그들의 연기를 통해 충분히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감동이었던 건 차태현의 그림실력이었다. (너무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쯤에서 생략). 영화 속에 나오는 그림이 꽤나 괜찮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올라가는 엔드크레딧에서 이번 그림을 담당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엄유정'이라는 작가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일단은 화보같은 사진들이 쏟아져서 누군지 감을 못잡긴 했는데, 작가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주로 굵은 선과 생활에 밀접한 캐릭터, 상황표현으로 보는 이들이 쉽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스타일의 삽화를 자주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 아주 적합하지 않았나 (종로구에서 섭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각된다.
오랜만에 남상미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던것도 좋았다. 외형적으로는 명랑하고 밝은 캐릭터이기에 아마 아직은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그 캐릭터를 가장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모든 배우들이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쏟아붓는 몰입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나오는 잠만 자는 아빠의 정체 또한 재미있는 인물구성이라니, 감독님이 작정하고 깨알을 이곳저곳에 숨겨놓으신 듯 하다.
슬로우비디오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초등학생 시절, 남몰래 좋아하던 여학생과 함께 뛰게 된 운동회 계주에서 갑작스런 동체시력이 발현된 주인공은 자신의 특이한 시력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평생을 골방 안에서 드라마와 함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시력을 활용한 직장을 찾았고 (종로구 CCTV 종합관제센터) 그곳에서 현실 속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 속에 함께 뛰어들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남상미를 발견하게 되고 호감에 이끌려 몇 번에 걸쳐 고백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차이고 만다. 차태현의 처절한 고백을 성공리에 이룰 수 있도록 그의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이게 되고, 차태현은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에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시력으로 달리기를 해서는 안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는 이를 위해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달리게 된다. 결론만 놓고 이야기 하자면 해피엔딩이다. 어떤 식으로 해피엔딩이 될지는 직접 영화를 통해 확인하면 좋을 것 같다.
영화를 보다보면 주로 차태현의 독백(생각)이 많이 들리는 걸 알 수 있다. 평생을 타인과의 교류 없이 지내오다보니 대화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 안타깝지만은 않았다. 상대방이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마침내 차태현도 사회 속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재미있고 유쾌한 영화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고 있던 내가, 눈물을 흘린 대사가 하나 있었다. "봄도 아닌데 꽃향기가 난다."라는 대사였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봄이 아니라는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꽃향기가 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꽃향기라는 것은 비단 사람에게서 나는 물리적인 향기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측면으로 봤을 때 이 대사를 하는 차태현의 심정으로 조금 들어가보려고 하니 울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향수처럼 독하지 않은, 하지만 마른 공기처럼 무미건조하지도 않은, 적당히 촉촉하고 적당히 향기로운 그 꽃향기가 봄이 아닌데도 났다. 그의 인생에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던 대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서운 말도 많이 하고, 나쁜 말도 많이 하지만 생각보다 아름다운 말이나 생각을 할 때가 꽤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을 떠올리기에 마주친 그 시간은 너무나도 짧기 때문에 그 여운이 오래 가지 못하고 머릿 속에서 금방 사라지곤 한다. 이렇게 흩어날아가는 아름다운 생각들을 붙잡아 대사를 쓴다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는 공익이야 직원이야??"
결과적으로, 착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순수하게 살아야겠다는, 어찌보면 유치할지도 모르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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