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힘으로 살다_뮤지컬 '주그리 우스리'
영화를 보다 보면 '긴 호흡'이라는 것이 있다. 장면의 끊김이나 편집이 없이 순수하게 배우의 연기력만으로 긴 대사나 상황을 보여줄 때 '호흡이 길다'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한다. 단 한번의 테이크로 긴 메시지를 전달하다보니 배우들의 연기력이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는 '편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대사가 틀리거나 촬영이 잘못된 경우 재 촬영을 통해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바로 연극의 묘미가 있다.
앞서 굳이 영화의 긴 호흡이라는 말을 썼던 것은, 연극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관객과 배우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호흡해야 한다. NG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같은 부분을 두 번 연기하는 일도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연극의 특성이 그렇다보니 연기를 하는 배우도, 관람하는 관객도 어느 정도의 적당한 긴장감을 갖고 극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긴장감이라고 해서 딱딱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관객의 반응이나 호응에 따라 적당한 유머와 재치들이 가미될 수가 있다. 이 또한 연극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부분은 관객들이 일일히 캐치하지는 못한다. 그저 더 즐겁게 연극을 관람할 수 있을 뿐.)
이번에 관람한 '주그리 우스리'라는 연극은 이미 연극계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소재가 신선할 뿐 아니라 국내 창작극이라는 점에서도 스토리의 구조가 탄탄하기로 소문이 난 것이다. 연극을 자주 접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연극 한편을 통해 새롭고도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만큼 '주그리 우스리'는 탄탄하게 제작되었다.
'딜쿠샤'라는 공간에 모인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한데 모여 치유하고, 또 서로에게 의지하고 기대며 희망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나이나 성별, 직업에 전혀 상관없이 인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한 순간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지만 저승차사의 도움(?)으로 인생의 의미를 되찾고, 또 희망을 찾아간다는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취업 실패를 겪은 만년 취업준비생, 사랑하는 자식과 손주를 잃고 마음앓이가 심했던 할머니, 독특한 성격 탓에 친구들의 왕따른 견디지 못했던 고등학생 소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았지만 그로인해 원래의 삶을 잃은 한 남...여자,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고 연예인으로서의 지명도도 낮아 자괴감에 빠졌던 연예인까지. 캐릭터의 설정을 곰곰히 뜯어보니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그러나 우리가 깊이 관심갖지 않고 그저 겉으로만 위로를 건네는,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관심과 위로가 필요한 캐릭터들이었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히 일어나는 취업문제, 왕따, 사고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낯선 상황은 없었지만 그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에 대해서도 다시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캐릭터 구성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가운데 진행된 연극은 때론 즐겁고 유쾌한 음악으로, 때로는 슬프고 애잔한 감정의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왔다.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배우'라는 직업이 결코 쉽지 않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기도 했다. 자신이 살아본 적 없는 타인의 삶을 연기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그리 우스리'의 배우들은 그 캐릭터들에게 담겨있는 상처를 더할 나위 없이 잘 표현해 주었던 것 같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 2명이 있는데, 저승 최고의 차사가 되고 싶어하는 저승사자와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할머니 캐릭터였다. 저승사자 캐럭터는 배우의 외모와 목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맘에 들어서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였고, 할머니를 연기해주신 분은 목소리나 연기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그 배우의 실제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연기를 잘 해주셨기 때문이다. 다른 배우분들은 제 나이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역할이라 분장에 큰 어려움이 없으셨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 캐릭터의 경우에는 머리부터 자세, 얼굴, 손 등에 이르기까지 신경써야 할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완벽한 분장덕에 깜빡하고 진짜 할머니인 줄 착각했을정도니 말이다.
세상 살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극중에서는 '죽을 힘으로 살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죽을 힘이 남아있다면, 그 힘으로 다시한 번 살고자 한다면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삶에 버거워 잊고 살았던 메시지를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던 좋은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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