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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king/프레젠테이션 스토리

기획자가 왜 디자인을 해야 하죠?

by 여히_ 2020. 6. 25.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획자도 디자인을 해야 한다. 

 

나는 프로필에도 적혀있듯 '걍 홍보기획자'이다. 이전 글에서도 서술했듯이, 다양한 분야의 기획을 한다. TVCF, 홍보영상, 프레젠테이션, 교육영상, 매뉴얼 영상, 각종 인쇄물 (브로슈어, 포스터, 리플릿, 초대장 등등)뿐만 아니라 행사, 드라마도 있다. 뭐 꼭 홍보가 아니더라도 기획자의 머리로 할 수 있는 기획이라면 뭐든지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내가 굳이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기획안을 쓰며 업무를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실무에서의 나는 기획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을 진행하기도 하고,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디자인은 기획안을 위한 파워포인트 디자인이 아니라 진짜 디자인.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같은) 나는 단 한 번도 기획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동안 '왜 내가 디자인을 해야 하는 거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응당 기획안이란 놈을 쓰기 위해선 당연히 '레이아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거고, 가독성 높은 서체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거며, 방대한 자료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하는 기술과 이를 도식화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스타일에 따라 또는 기획안의 내용에 따라 표지를 비롯한 페이지 디자인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획자와 디자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Photo by Med Badr Chemmaoui on Unsplash

 

기본기, 기본기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세련되고 독특하고 예쁜 파워포인트 디자인을 온라인에 공유하기도 하고, 전문적으로 디자인된 파일을 판매하기도 한다. 더욱 깔끔한 디자인을 위한 노하우나 팁을 공유하는 사례도 적잖이 봐왔으며, 나 또한 관련 자료들을 블로그에 올려둔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사람이 좋은 자료를 공유해 주었다고 해도, 정작 기획안을 작성하는 내가 디자인을 볼 줄 아는 눈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도 독서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많이 보면 볼수록 좋다. 좋은 것을 많이 본다면 더욱 좋다. 나는 본디 건축 인테리어를 전공한 사람이고, 디자인에 관한 흥미치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디자인 비슷한 전시회나 박람회는 줄기차게 쫓아다녔다. 대규모의 박람회도 있었고, 어느 작은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도 있었다. 그렇게 관심 갖고 많이 봤던 게 이제 와서 조금씩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발 좋은 걸 봐라. 그리고 봤으면 배워라.

똑같은 내용을 주고 기획안을 쓰라고 하면 50페이지짜리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보기 좋게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똑같이 써도 조잡하고 난해하게 써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디자인의 문제보다는 맥락을 이해하는데서부터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디자인이 중심이기 때문에 포커스를 디자인에 놓고 생각해 봤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획안 하나를 쓰는데 알아야 할 요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 그쪽 분야 전공자나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잘 쓰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다양한 좋은 자료를 많이 봐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조잡하고 난해하게 쓰는 사람들이 좋은 자료를 더 안 본다는 점이다. 분명 누군가가 잘 만들어놓은, 잘 써놓은 사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똥 굵다'를 외치며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건 비단 디자인에 관한 감의 차이라기보다는, 남과 다른 나의 부족한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밀어붙이려는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성격이 아니더라도 일단은 좋은 것들을 많이 봐야 한다.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해보면 난다 긴다 하는 파워포인트 고수들이 현란한 실력을 뽐내는 자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 자료들을 외면할 이유는 하등 없다. '저시키가 나보다 잘하는 척을 하네'가 아니라 '저렇게 쓰면 깔끔해지는구나!' 라며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가해라, 까라면 까야지

우리나라 업무 중에 참 좋지 않은 상사의 업무습관 중 하나가 '이건 내가 못하니까 잘하는 니가 해라'다. 나보다도 오래 일한 사람이, 왜 나는 할 줄 아는 걸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완벽하진 않아도 그 상사란 작자도 마음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러다 일을 준다. 물론 상사가 해야 하는 더 많은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상사가 그러하지 않다. 그 일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번거로우니까. 어느 세월에 파워포인트 마스터 페이지를 열어서 레이아웃을 짜고, 일일이 서체를 변경하고, 이미지를 편집하고, 도형을 만들고 있으랴. 그런 상사는 결국 도태되고 만다. (당장은 아니고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도태된다.) 그렇게 도태되는 상사가 되고 싶지 않으면, 다소 손이 가는 일이라도 자신이 해야 할 업무 범주에 속한 일이라면 스스로 해 버릇해야 한다. 언제까지 아랫 직원이 똥오줌 닦아줄 순 없는 일이다. 자신의 스킬이 부족하여 업무를 지시하는 건 권력남용에 가깝고, 스스로 그만큼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대놓고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까라면 까야지'하는 식의 업무분장과 업무 하달이 결과적으로는 자신과 부하직원 모두가 손해를 입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상사는 기획안 디자인을 자신이 안 하게 돼서 스킬이 늘지 않게 될 것이고, 부하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다는 점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 둘 다 죽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비단 기획안 디자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모든 업무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냥 한 번쯤 꼬집어보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계급장 떼고 사람대 사람으로 만나면 무시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작정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 달려드는 개떡 같은 상사들은 나도 싫으니까.

 

회사는 단 하나만을 원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스스로의 몫일뿐.

각설하고, 이 글은 단지 '기획자도 디자인을 해야 한다'에서만 국한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쓰다 보니 그렇다.) 소제목에 살포시 보이듯이, 회사가 권장하는 업무범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 나는 기획자이다. 파워포인트로 기획안을 쓴다. 그나마 내 기획안이 조금 더 눈에 띄고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는 슬라이드를 꾸며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인에 관한 정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디자인이 잘 된 파일들을 연습 삼아 따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의 과정 중에 회사가 권장하는 업무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 예상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다. 아마 상사의 지시는 비슷했으리라. "몇 월 며칠까지 기획안 좀 써봐."라고. 하지만 그 기획 같을 얼마만큼 매력적으로 쓰는지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린 거고, 회사는 그 업무를 통해 그 사람의 역량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 의도를 알았다면 디자인을 하는 것이 남일 같기만 하고 회사만 배 불리는 일로 느껴질지언정, 어쨌든 내 업무 스킬이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해야 한다. 분명, 언젠가는, 약이 될 테니까 말이다. (개중에는 진짜 도움 안 되는 일을 주는 상사도 있는데, 그건 그냥 후딱 해치워버리는 게 편하다. 스트레스도 병이 된다.)

 

나는 내 기획안을 더욱 어필하기 위해 디자인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렇다 보니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하나둘씩 손대야 하는 일이 늘어났을 뿐이다. 결코 누가 시켜서 포토샵으로 이미지톤을 보정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파워포인트에는 없는 도형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일단 '나'라는 기준을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선택했을 뿐이다. 내가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기획자였다면 나는 디자인의 디귿에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도 무관하다. 다만, 그 선택을 했을 경우 나는 지금보다 훨씬 도태되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든 기획안이 왠지 촌스러운데, 앞자리의 누군가가 디자인을 참 잘한다고 하니 맡겨봐야지.' 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개나 줘라. 그렇게 자신 없고, 그렇게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 싫으면 그냥 그 일을 때려치워라. 정시에 출근하고 야근한다고 해서 회사가 월급 주는 게 절대 아니다. 기획이든 디자인이든 스스로 해 버릇해야 실력이 는다. 내 실력이 성장하는 게 때려 죽어도 싫다면, 계속 앞자리의 누군가에게 그 일을 시켜라. 그 앞자리 직원은 성장하고 당신은 점점 도태될 테니까.

 

 


기획자도 '스스로' 디자인을 해야 한다. 성장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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